강제 근로, 정신.신체 자유의 구속, 상여금과 급여, 해고, 퇴직금, 최저임금, 근로 시간, 

야간 및 휴일근로, 유급 휴가, 연소자 사용 등...

1970년대에 쓰인 소설이지만, 작가가 그 시절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던진 화두들은 4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현시점에도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거나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다. 

그야말로 여전히 살아있는 단어로 우리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이 책을 읽고난 나의 첫번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문제의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강압적인 자본에 정당한 권리와 처우를 

요청했음에도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바뀌지 않고 변화 속도가 그렇게 느렸던 이유는, 자본 역시 그들이 쉽게 이윤을 추구하는데 

불리한 쪽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한 분들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이내 드는 책 읽기였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10수 년 전의 대학생 때였다. 

하지만, 그 때는 사회문제나 노동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 이었다. 

부끄럽지만, 내 한 몸 세상에 비비고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전공 공부만 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이 책에 등장하는 낯선 단어들은 나의 관심 밖이었고, 눈으로 활자는 읽었지만 많은 생각을 남기진 않았었다. 

단지 지금도 너무나 쉽게 유지되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막연한 불만만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해버렸다. 


  사회에 나와서 나의 노력과 젊음을 회사를 위해 쓰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급여를 받고, 그것으로 다시 미래를 계획해 보면서...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일을 사랑하던 이들을 '경영 정상화'라는 참 쉬운 말 한마디고 떠나보내도 보면서... 

 나는 비로서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난쟁이였음을... 그리고 힘없는 난장이의 자식이었음을 말이다. 

내가 난장이임을 자각하고 읽은 두 번째 책 읽기는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보다 울림이 좀 더 컸음을 느낀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임금을 받고 일하는 이들의 입장과 처지도 제 각각이 되었다. 

회사의 임원은 정규 직원의 임금과 정년 보장에 큰 관심이 없고, 사무직은 생산직의 노동시간에 큰 관심이 없으며, 

생산직은 사무직의 고용불안에 관심이 크지 않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대한 이해가 크지 않다. 

난장이 들이 각자의 가족과 하루 살아내기에도 숨이 차서, 다른 이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가 참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각자가 난 다르다고 생각하고, 난 다를 것이라고 위안하며, 모두가 개인의 문제에만 눈을 돌릴 때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되려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본은 더 본인들이 유리한 시스템 속에 우리 난장이들을 두려고 할 것이다.


아직 바꾸어야 하는 것이 많은 세상이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기에, 이 책은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모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야. 너의 할아버지는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둘렀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일한적이 이때까지 없었어. 너의 할아버지는 모든 법조항을 무시했어. 강제근로, 

정신.신체 자유의 구속, 상여금과 급여, 해고, 퇴직금, 최저 임금, 근로 시간, 야간 및 휴일 근로, 유급 휴가, 연소자 사용 등, 

이들 조항을 어긴 부당 노동 해위 외에도 노조 활동 억압, 직장 폐쇄 협박 등 위법 사례를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야. 

난장이 아저씨의 딸이 읽던 책을 보았어. 너의 할아버지가 한 말이 거기 씌어져 있었다구.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고 축적할 

때라고 씌어져 있었더. 그리고, 너의 할아버지는 돌아갔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나누어주지? 너의 할아버지가 죽은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을 다 주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그걸 몰랐지? 몰랐기 때문에 방학을 그 

할아버지의 영토인 아름다운 섬에 가서 보냈고, 빨간 승용차를 탔고, 고기와 싱싱한 야채가 늘 오르는 식탁을 대했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남자아이를 생각했고, 그 남자아이를 끌어내기 위해 불쌍한 아이들을 팔았지? 이제 네 죄에서 네가 스스로 벗어나야 돼. 

지금까진 너희를 위해서 난자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의 어린 동료들이 희생을 당해왔어. 

지금부터는 그들을 위해 너희가 희생할 차례야. 알겠니? 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에게 말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궤도회전 중...   



읽는데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치 생활을 관성에 맡기고 내버려 뒀다가 새삼 내가 어디 쯤에 있는지를 생각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듯,

그렇게 침대 한켠에 배갯잇처럼 던져두었다가 다시 나름 정신을 다잡고 읽기를 반복한 끝에, 

책의 마지막 장을 휴일 아침 커피의 힘을 빌려 넘길 수 있었다. 


아프고 쓰라렸다. 

우리에게는 너무 아파서 애써 들여다보거나 건드려보지 않는 상처가 저마다 있다. 

너무 오랜동안 외면하려 애써왔던 상처여서 어느 순간 본인도 괜찮은 줄로만 알고 지내오던 상처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 상처들이 거기 있었음을,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았음을 직접 상처를 건드려서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읽다가 놓기를 반복했었다. 

읽다가 힘들어지면 언제나 그래왔듯 바쁜일상뒤에 숨고, 

트렌디한 티브이예능들과 주변의 경조사들을 쫓아다니며, 난 여전히 바깥의 여름속에 있다고 자위하며 지내버렸다.


하지만 소설이 결국 건드려준 것들 속에는, 감당못할 아니 책임지지 못할 사랑에 대한 내 죄의식이 있었고, 

언제까지고 존재할 것 같던 일상과, 함께했던 시간들의 갑작스런 부재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막막함이 있었다.  


난 여전히 겨울을 나고 있었고, 이리저리 흩날리는 눈처럼 갈 곳을 몰라 부유하고 있었다.

올해는 진짜 여름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