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동물 농장에 살고 있으며, 돼지들의 거짓 선동과 양들의 영혼없는 선전속에 살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층들의 부패와 타락의 과정을 동물농장에 빗대어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작품 해설을 통해서 알았다. 

작품을 읽는 동안에는 전혀 그러한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사회, 나아가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서 동물 농장의 부조리들을 적나라하게 보고 살아 가고 있으며, 

손쉽게 이입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조직된 노동조합의  간부가 비정규직에 뒷돈을 받고 채용에 관여하는 일, 국민의 권익을 위해 사회의 부조리를 가감없이 

알려야 하는 언론이 광고를 주는 대기업의 비리와 권력자의 치부를 가리는데 열중하는 행태, 급기야는 국가와 국민에 봉사해야 하는 고위 공무원의

입에서 대중을 개돼지로 지칭하는  말까지 튀어 나오는 일련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이 얼마나 동물 농장의 살찐 돼지, 양들과 닮았는가?


 다수의 염원과 목적을 담아 만들어진 조직 속에서, 좀더 효율 적으로 운영 될 수 있도록 대분의 동의 하에 쥐어 준 권한을 대단한 특권이양 휘두르고

급기야 권력이라는 힘의 논리에 취해서 대중들의 권리와 생명까지도 침해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도 무수히 되풀이 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돼지 무리들과 이를 외면하는 양들을 더이상 만들어 내지 않는  방법이 무었인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고도로 복잡해지고, 돈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교묘하게 대중을 통제하기는 점점더 손쉬워 

지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이를 감시하고, 대중과 다수의 행복과 권익을 위해 사회적인 자원들이 쓰여 질 수 있도록 감시 와 점검을 

투명하게 할 수있는 시스템이 법적으로 정착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법조인들의 비리 사건들을 접할때면, 부패한 동물 농장에서 생각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 그레고르는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라고 소설은 시작한다. 

고등학생때 소설을 처음 접했을때에도 꽤나 충격적인 설정이었다.

소설은 하루아침에 흉측한 해충이 되어 가족들의 생활 공간속에서 지내게 되는 상황을, 주인공인 그레고르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처음에는, 그레고르의 형용할 수 없는 상황에 감정 이입이 되어 읽었었다.

나이가 든 지금 다시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그레고르와 가족과의 관계에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하기 전에는, 집안의 거의 모든 경제 활동을 책임지고 있었다. 

가족들의 생활은 그레고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자신또한 동생을 예술 학교에 입학시킬 꿈까지 꾸며 뿌듯해 했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해충으로 변하게 되면서, 더 이상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가족들은 예전의 그레고르가 넉넉히 벌어오던 때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한 날 아침 그 자신의 놀라움, 가족들의 당혹스러움으로 이 사건은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레고르는 걱정과 연민의 대상이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현실이 되어갔으며,  당연히 외부에는 숨겨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대신하여 생계를 꾸려나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레고르는 그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은 돈을 아버지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기도 한다. 

그레고르 자신의 공포와 당혹스러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가족으로 부터 제외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 관계마저 소외되고 만다.  


  난 카프카가 주인공인 그레고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해충으로 변하는 극단적인 장치를 사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가족, 사회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존제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자신이 속해있던 관계는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런면에서 이 소설을 다시보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을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가족들은 자신이 제외된 상황에 익숙해지고, 많은 부분들을 그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음을 확인 한다. 

종국에는 소외되다 못해 쓸쓸히 죽어가고, 그 상황또한 가족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10년 정도의 짧다면 짧은 사회생활에 비춰 볼 때,  무척 낯익은 모습니다.

그래고르의 변신은 갑작스러운 질병일 수도 있고, 나이듦일 수 있고, 또는 더 나아가 직장에서의 갑작스러운 입지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변신을 보았고, 나중에는 익숙하게 받아들였으며, 그 관계에 적응해온건 아닌가 생각한다.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가족의 와병또는 죽음, 당당했던 직장 상사의 좌천...  이 모두 변신이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나 또한 가족 속에서, 직장 에서 한마리 해충으로 변해있는 나를 발견할 날이 올까?

난 그때를 대비해 나는 어떤 의미를 두고 나의 관계들을 대해야 할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다가올 변신을 대비하는 방법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