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전 석장


                                               김사인


꼴좋다 아큐여

그 잘난 나라여.

반만년이라더냐 조상의 빛난 얼이라더냐.

오냐 민족중흥이겠구나.

나라여

오냐 나여.


가는 세월 원통하구나.

제가 떠난 것이냐 누가 떠민 것이냐.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았구나.

더럽게 남았구나.

지전 몇장에 팔려 세월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인지 네월인지 안중에 없었구나.

기구하다 싸구려 허풍쟁이 똥걸레로구나.

백주대낮에

눈 뜬 채 코를 털렸으니

우스꽝스러운 피칠갑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겠구나.

낄낄 웃겠구나.


손톱 젖혀지도록 할퀴어 잡으며 세월 가는 동안

공포와 비명으로 흘러가는 동안

물에 젖은 오만원짜리 석장!

꼴좋다 나여

아직도 꼭 쥐고 있구나.


국민소득이라고? 집값이 어쨌다고?

똥개야, 노느니 차라리 나라도 물어라.

이따위를 적고 있는 내 손목이라도 물어라.

종이나 울려라 개떼처럼 왕왕왕

입춘대길 만사형통

때늦은 입춘방이나 하나 그려

네 이마빡에 여덟 팔자로 붙여주마.


오냐 나여, 그래도 잠은 또 오겠구나.

배는 또 고파지겠구나 버러지처럼

오냐 나라여.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2015년 



4월에 슬픈 시한편 있어, 여기에 옮겨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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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탈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볕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참 정갈한 시구다. 내 마음을 한번에 때린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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