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

선택적 정의...

최근 몇 주 동안 대한민국에 많이 회자되었던 단어이다... 악질 적이고, 혐의 입증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범죄에 대해 눈감고, 외면하는 수사 기관들과 언론, 그리고 일부 사회 이슈에 대해서만 바른 척 목소리를 내는 대학을 주축으로 한 지식사회를 보면서 많이 답답해하고 인터넷을 통해 분노를 틈만 나면 표현했었다.

 하지만, 출근하면서 열어본 이 한 장의 그림은 하루 종일 내 생각의 어딘가를 배회하며,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내가 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내 목소리들은 과연 선택적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에게 크게 와 닿거나, 사회에서 크게 떠들어대는 이슈에 편승해 이런저런 잡다한 목소리를 내고 있진 않은가?'하는 생각들로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너무 손쉬운 분노만을 해 왔다는 반성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깨어있는 시민의 단합된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와 조금은 거리가 멀다고 인식되는 사회 문제에도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 적으로 옮음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삼성해고자 김용희 씨와 톨게이트 요금징수원의 투쟁, 그리고 그 보다 더 작을, 그래서 사회 한켠에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어보지 못한 정의들에 대해 말이다.